19세기 말, 우리나라는 근대화의 물결이 높아가는 한편, 조선 왕조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일본, 청, 러시아등 이웃나라들의 세력 다툼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의 운명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형편 이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속에서, 신학문으로 무장한 인재를 양성하여 그들의 힘으로 기울어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고종 황제는 1899년 4월 4일 칙령 제 11호로 "중학교 관제"를 공포하였다. 그 후 약 1년 반에 걸친 준비 끝에 드디어 1900년 10월 3일, 북악산 자락인 화동언덕(현, 정독도서관 자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정규 중등 교육기관인 "관립 중학교" 가 문을 열게 되었으며, 이로써 우리나라에서 정규 중등 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에는 전국에 걸쳐 유일한 정규 중학교 였으므로 특별히 이름을 붙일 필요성을 못느껴 그냥 "관립 중학교" 라 불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영어학교, 일어학교 등의 외국어 학교나 상공학교, 또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특수 기능인을 양성하거나 종교적 목적을 우선하여 제한된 교육만 하는 교육 기관이었지 정규 중등교육기관이 아니었다.
1906년에 비로소 학교 이름을 붙여 "관립 한성고등학교"라 하였다. 그러다가 1910년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고 일본에 의해 가혹한 식민통치를 받게 되면서 교육도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일본으로서는 식민지인 우리나리 학교에 고등학교는 물론 중학교라는 정규학교 명칭을 붙이고 싶지 않아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 와있는 일본인들의 자제가 다니는 학교에는 "중학교"라는 명칭을 붙이면서도 조선인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고등보통학교"라는 명칭을 붙이도록 했는데, 이에 따라 "관립 한성고등학교"로부터 "경성고등보통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때부터 1945년 광복할때까지 8명의 일본인 교장이 거쳐갔다. "고등보통학교"는 일본인의 "중학교"와 차별하여 졸업하더라도 상급학교로 진학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아 상급학교로 진학하려면 일본에 있는 중학교로 편입해야 했다.
1921년 서울에 고등보통학교를 하나 더 설치하면서 우리학교는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 생긴 학교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라 칭하였다. 우리학교는 개교이래 줄곧 전국의 수재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모여들어 수학함으로써 "경성제1고보"교복을 입고 다니는 것은 물론, 합격, 불합격에 관계없이 "경성제1고보"에 입학시험을 보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영광으로 여겨 입학시험 응시 기념 단체 사진을 찍어 한 장씩 소중히 간직할 정도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우라나라에서는 1919년 기미 독립만세 운동을 비롯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줄기차게 일어나고있는 한편, 일본은 동남아시아, 중국 등지로 침략 전쟁을 넓펴 나갔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한편으로는 조선인들을 달래서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약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점점 확대되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막대한 인적자원도 조선으로부터 조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야욕에 바탕을 두고 등장한것이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이다. 즉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니 저항운동도 그렇게 계속할 일이 아니고, 또 천황에게 충성하여 군대에도 나가 전쟁에 참여 해야 한다는 뜻이 뒤에 숨겨져 있는 정책이다. 이러한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교육분야에 있어서도 그동안 일본에 비하여 차별적인 대접을 했던 "고등보통학교"를 일본과 같은 "중학교"로 바꾸게 되었다. 그래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는 "경성제일중학교"가 되어야 하는데 조선인이 다니는 학교에 "제일"이라는 명칭을 붙이는것이 일본으로서는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제일"을 떼어버리자니 이미 일본인들이 다니던 "경성중학교"가 있으니 그럴수도 없었다. 고심 끝에 같은 지방 이름을 딴 조선인 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인 중학교가 있을 경우 일본인 중학교 이름을 그대로 두고 조선인 고등보통학교만 "도"의 이름을 따거나 위치에 따라 "동중" 또는 "서중"으로 고쳤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는 "경기"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는 "경기"라는 "도"이름을 또 쓸수가 없으므로, 경복궁 옆에 있다하여 "경복"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광복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우리학교를 비롯한 몇몇 일류 중학교를 향한 입시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져 마침내 과열 입시의 폐단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당시 일류 중학교를 없애는 정책에 의해 1971년 우리학교도 중학교가 없어지고 고등학교만 남게 되었고, 고등학교도 1974학년도부터는 평준화 시책에 의해 신입생을 추첨 배정받게 되었다. 1976년에는 삼성동 현 교사자리로 이전하여 경기고등학교의 영동시대를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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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개교
•1900년 10월 3일 종로구 화동 1번지에서 한국 최초의 '관립중학교'로 개교(현재의 정독 도서관 자리)
•부지 : 개화파의 영수 김옥균의 집터 + 서재필 박사의 집터
*1885년 배재학당 창립, 1886년 이화학당 창립, 1897년 숭실학교 설립
•개교당시 학교의 모습
학용품 무료 지급, 매일 백동화 한푼씩 지급(2전 점심값, 5전 담배값) 현직 관리도 가마를 타고 하인에게 담뱃대를 들리고 등교
나. 관립 한성고등학교(1906 ~ 1910)
다. 경성고등보통학교(1910-1921) 4년제
•일본인 교장의 취임
•3.1운동 참여 - 심훈(본명 심대섭)외 27명 구속
•스케이팅 필수과목 지정(현재 쇼트트랙과 연관)
라. 경성제일 고등보통학교(1921-1938, 약칭 제일고보) 5년제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 설립에 따른 개명
•입학난(1928년 현재)
제1고보(1,140명 지원 / 200명 모집)
제2고보(877명 지원 / 150명 모집)
경성중학(343명 지원 / 200명 모집)
용산중학(363명 지원 / 150명 모집)
•다이아몬드형 교표(뱃지) 제정(1931년), 오늘과 같은 뱃지가 제정, 사용된것은 1952년부터
마. 경기공립중학교(1938-1945)
•소재지 시도 명칭에 따른 개명(경기, 경복)
•경기(京畿)의 의미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
•교가와 교복의 제정(1948년)
바. 경기중고등학교(1950-1970)
•6.25 동란과 피난지 부산에서의 임시학교
•1951년 중. 고등학교 분리
•교훈제정 :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1955년)
•1956년 화동 옛교사로 복귀
사. 경기고등학교(1971~ )
•1971년 중학교 폐쇄
(당시 폐쇄된 세칭 일류 중학교들 : 경기중, 경복중, 서울중, 경기여중, 이화여중)
•1971년 생활관 교육 시작
•1976년 2월 20일 강남구 삼성동 74번지 수도산 언덕으로 이전
(원래 봉은사 소유의 땅이었음. 2000년 3월 개교한 정애학교의 부지도 경기고등학교 땅이었음.)
•2000년 2월 96회 졸업식
아. 경기의 입시제도
•초창기 : 추천반, 시험반
•1922년 ~ 1973년 : 전부 입시에 의해 선발
- 무우즙 파동, 창칼 파동..
•1974년 ~ : 무시험 배정
출처 : [생활관 안내] - 경기고등학교